시체실에서 연극은 시작된다.
아니, 시작부터 끝까지 시체실이 배경이다.
하지만 하나도 무서운것은 없다.
죽은 사람 6명이 시체실을 지키는 사람과 나누는 자유로운 대화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무서울 것은 없다.
여기 나오는 죽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살한 사람들이다.
나는 왜 자살을 했는가에 대한 시체들의 넋두리를 시체실을 지키는 사람에게 푸념하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현실세계 뿐 아니라 저승을 오가면서 진행되기도 한다.
농약을 먹고 자살한 사람,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
승용차 타고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은 사람,
수면제로 자살한 사람,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
동맥을 절단하여 자살한 사람, 이렇게 6명이 나오는데 재밌는건 모두 여자다.
아참, 물론 죽은사람의 남편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여자들의 연극이라는 점을 깨지는 못한다.
그러다보니, 이 극은 여자대학교의 연극반의 단골 공연이다.
나도 처음 접한것이 여대 연극반 작품이었다.
웃음속에서 나오는 씁쓸한 현실세계의 고통을 잘 그려낸 장진 작품!
죽은 사람들은 다양한 이력을 가졌지만 온전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남편의 바람 때문에, 소극적 성격 때문에, 유부남과의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의 불륜과 학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 암에 걸렸으나 치료비가 없어서, 비정상적인 직장생활의 괴로움 때문에 자살했다.
그런데 왜 작품 제목이 ‘아름다운 사인’일까?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자살하지 않는 죽음? 정상적인 죽음? 그렇다. 연극은 정상적인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인이라고 제목을 넣은 이유는 정상적으로 죽기 어려운 삶에 대한 역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도덕적이지 못한 삶에 희생된 자살, 과중한 학업에 시달린 자살, 비윤리적 상황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자살, 병고에 시달린 자살. 이러한 죽음이 널린 시대와 그런 시대를 엮어가는 병든 정신에 대한 비판을 이 작품은 보여 준다.
공연 중간 중간에 보여지는 시체들간의 다툼, 과장된 어투와 서러운 감정의 포장과 복합된 감정의 좌충우돌 속에서 보는 이들은 웃음을 머금게 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편하고 가볍게 인식하도록 하는 극적 장치들인 것이다. 비판적 주제를 관객에게 쉽게 접근시키려는 희극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사인』은 다양한 죽음을 통해 동시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을 희화화를 통해 비판하고 되짚어 보는 내용을 죽은 이들을 위무하는 굿형식에 빌어 보여주는 작품이다.